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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문사 사건 승소 소식

나의 이야기

by 뽈삼촌 2011. 7. 25.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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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는 참여예산 토론회, 주민간담회 준비에, 추가경정예산 특별위원회 회의에,

처남의 교통사고  뒷처리에 무척이나 바빴던 기간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2009년 제가 대통령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있을 때

진상규명한 사건의 유족으로부터 받은 전화였습니다.

 

국가유공자유족등록거부처분 취소 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방금 법정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고맙다고.

 

너무나 긴 세월 죽은 아들의 죽음을 못잊어 싸워온 세월이었던 것이지요.

 

앞으로 2심, 대법원 판결이 남았지만

승소 가능성이 낮았던 만큼 기쁨은 두 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과정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89년 군복무 중에 자살을 했다.

군수사기관은 "언어폭력 등이 있었지만 구타 가혹행위가 심하지는 않았다. 여자문제, 복무부적응 등으로 인한 자살이다."고 결론을 내렸고,

가족들은 "절대로 그런 아이가 아니다, 자살을 인정하지 못한다. 군수사에 문제점이 많다, 타살의 개연성도 있다."고 주장하며 20년을 싸워 온 것이지요.

2005년 경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되었고,

2006년 민간조사관, 경찰, 검찰, 국방부, 행안부 파견 공무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통령소속의 위원회가 출범되어, 진정된 사건을 재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새로운 진술을 받아내고, 증거를 수집하고, 정신의학적 연구 성과를 보태어, 사망원인과 관련해 공무연관성과 순직임을 입증하기 시작한다.

위원회는 많은 사건을 진상규명하면서 국방부, 경찰청(전경), 법무부(교도대)에 사망원인과 관련 재심의를 요청하였다. 

경찰청과 법무부는 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여  순직으로 결정하였으나,

국방부는 자살 사건과 관련해서는 '자살은 자살일 뿐이다'라고 모두 거부하였다.

두 개 국가기관(위원회와 국방부)의 판단이 상이하면서 진상규명된 사건의 유족들은

법원에 판단을 요구하였다.

2008년까지 법원의 판단은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2009년 이후 법원의 판단은 이전과 달리 보수적인 판결이 주를 이루었다.

1심에서 승소한 사건들도 2심에서 번번이 패소하였다.

하지만 유족들은 지치지 않고 국가를 상대로 계속 싸우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제가 맡은 이 사건 진정인인 망인의 어머니는 조용하게 소송을 진행해왔더군요.

저도 애착을 가지고 조사를 한 사건이라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조사과정에 부대원들을 설득해, 새롭고 중요한 진술들을 받았기에

그것을 토대로 주요우울증 진단을 받을 수 있었고, 

군복무와 관련된 사망이라고 진상규명을 한 것이지요.

 

변호사의 준비서면에

담당 조사관의 탄원서가 있으면 더 좋겠다는 변호사의 조언에

어머니가 바로 전화를 했더군요.

 

그러자고 대답을 하고 며칠 속앓이를 했습니다.

대충 적을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조사보고서, 조사기록이 증거로 다 제출된 상태였기에

그 내용을 반복하기도 그렇고

어떤 내용을 적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탄원서를 받기위해 어머니는 멀리 마산에서 직접 제 사무실까지 오셨지요.

탄원서는 선고공판 일정이 잡힌 상태에서 제출되었는데

제가 보낸 탄원서를 본 판사가 일정을 연기했다고 하네요.

 

아마 조사기록을 더 검토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것이지요.

 

참 훌륭한 판사인 것 같습니다.

 

 

 

 

 

 

탄  원  서



사  건 :  2011구합59 국가유공자유족등록거부처분취소

원  고 :  김  기  순

피  고 :  창원보훈지청장

  


  위 사건에 관하여 당시 이수근 사건을 조사했던 담당 조사관의 마음을 전합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수근 사건을 담당했던 조사관 유병철입니다. 이수근 사건 조사를 위해 망인의 어머니를 만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네요. 조사관 일을 끝내고 지금은 지방의회 의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조사를 진행하며 공감했던 그 아이의 고통의 심원은 여전히 제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아들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던 그 어머니의 애절한 첫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 심성이 고운 아이었어요. 누나와 장난치기를 좋아했고, 친구들과도 참 잘 지내던 아이였습니다. 어머니를 끔찍이도 위했던 나의 아들입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죽었을 리는 없습니다.”


  진정인의 마음으로 조사를 진행하되 객관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임했습니다만, 조사하면 할수록 망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 참 힘들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는 조사결과보고서에 적시하였기에, 이참에 조사내용을 근거로  망인이 느꼈음직한 마음을 재구성해서 판사님께 올립니다.


나는 이렇게 병들어 갔습니다.


  신병훈련소에서 기본훈련이 마쳐갈 즈음.

  자대 배치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으로 조마조마 기다리는데 후반기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하네요. 다른 동기들은 갑판수병으로 함정으로 기지로 다들 떠나갑니다. 갑판병으로 남아 5주간의 훈련을 더 받았습니다. 후반기 교육이라 편했지요.


  해상에서 후임병들과 같이 전북함에 승선을 했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해군이 되는구나. 동기들도 많다고 하니 참 기대됩니다. 같이 뒹굴고 작업하고 근무를 서며 명상의 시간도 가지고 이제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는구나. 해병대를 나오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해군을 지원해 멋진 군생활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동기들의 눈빛이 이상하네요. 선임병들의 갈굼이나 군기 잡기는 어차피 예상했으니 문제가 아닌데.

  “빽으로 후반기 교육을 받으며 편하게 지내고 왔으니, 저 새끼는 고생을 더 해야 돼.”

1기수 후임병들의 빈정거림도 들리네요. “기수는 높지만 배 짬밥은 우리 아래야.”

동기병, 후임병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말을 걸며 무던히 애썼건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배멀미에 잠을 못자니 밥맛도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선임병들이 욕할 줄 알았는데 함정에서는 그런 일도 없네요. 다들 제 일에 바쁘고 신경질만 부립니다. 해상생활에 찌든 얼굴의 선임병들이 지나갈 때마다 머리를 툭툭 치며 창모자를 뒤흔듭니다.

  “빠져가지고...”

  ‘뭐가 빠졌다는지. 힘든 함정 생활. 이왕이면 즐겁게 하자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합니다. 드디어 신병훈련소에서 만났던 김인환과 같은 조가 되어 근무를 서게 됩니다. 망망대해 밤바다를 보며 이런 저런 고충을 얘기했는데 인환이 마저 저를 싫어하네요. 동기들이 다들 그렇게 얘기를 한다네요.


  어젯밤 집합에서는 헤치파이프로 목을 맞는 고참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아플까. 왜 저렇게 맞고만 있을까. 오늘 아침에는 출동 시간에 동작이 늦다고 또 머리를 맞았습니다. 제원을 못외웠다고 쇳덩어리로 머리를 때립니다. 아프지는 않네요. 멍해집니다. 잠시 눈을 붙여야 하지만 잠이 오지 않습니다.

  밤이 깊어가네요. 이제 기수집합에도 나가야 합니다. 갑판 바닥에 머리를 밀고, 발로 가슴팍을 맞고 쓰러지는 고참들의 모습을 옆에서 봅니다. 너무나 두렵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구타를 당해 악이 오른 그 고참들이 우리를 세워놓고 날라차기를 하네요. 안경이 깨집니다. 얼굴이 부어오릅니다. 이렇게 맞아가면서 군생활을 해야 하는지요. 머리가 멍해지고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듭니다. 함장도 갑판장도 전입할 때 보고는 만날 일이 없네요. 배멀미가 심해 위장 깊은 곳의 위액까지 토했습니다만 누구하나 챙겨주지 않습니다.


  어젯밤 전체 집합 이후 제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기억하기도 싫은 집합이었습니다. 새벽까지 이어진 집합을 마치고 바로 새벽근무를 나가 깨진 안경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고참들이 무서워서 더 이상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겠습니다. 혼자 멍하니 먼 바다를 봅니다.

  ‘뛰어내릴까. 뛰어내릴까. 저 멀리 원양어선까지 수영해서 가면 되지. 구명동의도 입고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


  ‘그렇게. 그렇게. 나는 어디에 있지. 엎드려 있는 이곳은 왜 이리 답답하지. 부대원들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내 누룽지는, 내 누룽지는’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옵니다.


  갑판장의 목소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놈 이상한 짓을 계속 하니 정신병원에 보냅시다. 귀찮으니 육지로 전출 보냅시다. 기지에 들어갈 때까지 격리시키지요.”

  어두운 격실에서 얼마나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식판이 들어옵니다만 먹지를 못하겠군요.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두운 격실, 싸늘한 기운이 온 몸에 스며듭니다. 감각도 없어집니다. 영창 7일이 지났다고 끌려나옵니다. 곰곰이 세어봅니다. 7일 간이면 168시간. 함장이 뭔가를 묻습니다. 무조건 ‘예’라고 대답을 합니다. 고참이 더블벡을 챙겨주네요.


 ‘육지로 가고 싶다. 육지로 가고 싶다.’

  

  몸이 이상합니다. 소화도 되지 않습니다. 몸도 부어오르네요. 잠을 자다가다도 자꾸 깹니다. 대기대 의무실에 갔더니 소화제 몇 알을 주네요. 몸은 편합니다만 마음은 자꾸 불안해집니다.


  이작도는 세 달 전에 동기인 정성태가 죽은 곳인데. ‘이갈리는 이작도’라고 하는데.


  전입 첫날, 너무나 배가 고파 동기 취사병이 끓여준 그 뜨거운 라면이 그냥 넘어가네요. 입에 화상을 입었는지 따갑습니다. 두 명의 동기는 총기자살사건 이후 바뀐 기지장의 당번병으로 가고, 한 명은 취사병으로 얼굴 볼 일이 없네요. 아무리 전입병이지만 일병인데, 위아래로 잘 지내려고 온화한 웃음을 보내봅니다. 곧바로 미친  놈이 아니냐고 머리를 때리네요. 맞는 것은 이제 이골이 났지만 말로 하는 협박은 정말 두렵습니다. 동기들과 얘기하며 풀고 싶지만 지나치며 보는 동기들의 얼굴이 너무 어둡고, 피하는 것 같아 말을 붙이지 못합니다. 내무반이 너무 두렵습니다. 정성태를 그렇게 몰아간 그 고참들이 그대로 다 남아 있네요. 그 사람들의 눈빛이 너무 무섭습니다. 싸늘한 얼굴의 고참이 상급자들의 관등성명을 외우라고 합니다. 외우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지난 4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나 자신이 이상합니다. 헷갈리는 고참들의 이름을 팔뚝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냥 적어 봅니다. 아무 의미가 없네요. 오늘 밤에도 정신없이 얻어  맞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이 없네요. 내무반은 더 이상 두려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몇 시일까. 아름이는 자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후임인 아름이가 자고 있는 당번실로 갑니다.  


  ‘정성태는 얼마나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오늘도 지휘검열 대비 훈련을 마치자마자 그 고참이 집합 장소에 올라오라고 하네요.

‘싫은데. 싫은데. 어젯밤에도 암기사항 외우느라,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한 숨 못잤는데...‘


 

 

 


 조사결과보고서에는 기재하지 않은 이작도 부대분위기에 대한 보충입니다

 이작도 기지의 경우 불과 3개월 전 망인의 동기병인 김성태의 총기자살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의 원인과 경위가 축소 은폐, 조작되어 있던 사실을 진술조서에 담았으나  진정 사건과 별건이라 보고서에 기재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헌병대는 도끼자루, 빗자루, 개머리판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때렸던 선임병들에 대한 조사는 전혀 진행하지 않았고, 부대에서는 근무시간을 조작해 기지장의 책임을 회피하였으며, 결국 편지 한 장을 근거로 여자 문제로 인한 자살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많은 부대원들이 증언한 내용입니다.

 결국 기지장이 교체되었으나, 구타 가혹행위자인 고참병들은 한 명도 전출되지 않았습니다. 망인은 이러한 무거운 부대 분위기를 대기대에 있는 동안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정성태의 사망 직전 이작도 부대는 지휘관들의 묵인 하에 도끼 자루, 소총 개머리판을 이용한 구타 가혹행위가 잔존해 있었고, 특히 부대 특성 상 음주 후 집합 구타가 빈번했다고 부대원들은 진술합니다.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기억 자체를 싫어했으며, 각자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망인이 처해있던 상황은 ‘통상의 군인이라면 감내할 정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망인의 자대 배치와 이후 전개 과정은 특별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리 강인한 정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정신’이 병들지 않을 수 있을까요.


  평범하게 살아오다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고자 해군으로 자원입대한 한 인간이 망가져 가는 과정을 조사하면서, 우리 국가가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야만적일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되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망인의 죽음 뒤편에 병들어 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머니, 망인의 가족들, 전북함에서 함께 생활한 망인의 동기병들, 짧은 기간에 두 명의 젊은 목숨을 잃어버린 이작도 부대원들. 그들은 아직도 망인의 이름을 그리고 그 직전 사망한 정성태의 이름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히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번 판결이 가족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치유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1. 6. 7.

대구광역시 북구의회 의원 유병철






창원지방법원  제1행정부(나)     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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