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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삼촌 2011. 2. 1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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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무소속 ‘풀뿌리 후보’ 볕 들 날 올까

2010 06/15ㅣ위클리경향 879호


ㆍ정당공천자 비해 조직·자금 열세… 기성 정치의 벽 넘기 어려워


  6·2 지방선거 결과는 ‘민심에 의한 여당 심판’으로 압축된다. 여기서 민심의 대리자는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이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여당이 지고 야당이 이긴 것으로 드러났다. 각 정당 후보자들이 표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각축하는 정당정치 구도 아래에서 지방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이긴 하지만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동네 정치’를 표방하며 선거에 뛰어든 이들도 있었다. 무소속 ‘풀뿌리 시민후보’들이다. 이들은 진정한 지방자치는 지역 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린 풀뿌리 후보들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2월 17일 서울 마포구 성미산 극장에서 열린 ‘풀뿌리 좋은 정치 네트워크’ 발족식에서 참가자들이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서성일 기자



  ‘풀넷’ 17명 후보 중 3명만 당선

지난 2월17일 전국 16개 풀뿌리 지역정치운동 단체들의 연대체인 풀뿌리좋은정치네트워크(풀넷)가 출범했다. 풀넷이 발족식에서 낸 성명은 무소속 시민후보에 의한 풀뿌리 정치가 지향하는 바를 명료하게 요약한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부패·독선·전횡·무능으로 점철돼 왔고, 생활정치의 공간이 돼야 할 지역정치도 중앙의 기득권 정당들이 장악해 왔다.… 동네 정치가 바뀌어야 정치가 바뀐다. 지역 기득권 정치의 벽을 뚫고 새로운 풀뿌리 정치운동의 흐름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벽은 높았다. 풀넷은 이번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17명의 후보를 냈다. 이 가운데 14명이 낙선하고, 3명만 당선됐다. 정당 간 대결 구도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지방선거에서 풀뿌리 후보들이 기성 정당정치의 벽을 넘어서기 힘들다는 방증이다.


지방선거에서 풀뿌리 후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부터다. 경실련, 한국여성단체연합, YMCA 등 중앙 시민단체들이 무소속 시민후보를 냈다. 그러나 이때는 한 명도 당선하지 못했다. 40년만에 부활한 지방자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이 절대적으로 낮았다.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민사회의 초록정치연대가 기초의원 선거에 20명을 내보냈지만 2명만 당선했다. 패인은 이때부터 도입된 기초의원 선거 정당공천제였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 시민후보들이 30여 명 당선된 것과 비교하면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제가 무소속 풀뿌리 후보들에게 얼마나 큰 벽으로 작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기성 정당정치의 벽을 뚫고 당선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전남도의회 의원에 당선된 전남 구례군 정정섭 후보(46)는 농민회장 출신 ‘농민 후보’다. 전남대 재학 중 미국산 쌀 수입으로 쌀값 문제가 불거지던 1987년에 귀농해 23년 동안 지역 농민 운동에 투신했다. 그가 지방선거 출마를 생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2004년 정부가 산수유를 수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다. 산수유가 특산물인 구례 지역 농민들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 당선자는 “당시 주민들과 힘을 합쳐 도에 한약재수급안정기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직접 도의회에 들어가 일하는 게 지역 농민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구 북구에서 구의회의원에 당선된 유병철 후보(48)도 지역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해 온 경우다. 그는 1991년 대구 북구의 달동네 지역에서 맞벌이 부부를 위한 탁아방을 운영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역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입시학원 경영으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지역아동센터, 작은도서관, 지역 노인복지 운동 등을 활발히 펼쳐 왔다. 자원봉사자 학교를 세워 12기까지 자원봉사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동네 정치에는 정당이 필요없다”

과천시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서형원 후보(42)는 풀넷이 낸 후보자 18명 가운데 유일한 현역 기초의원이다. 서 당선자는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과천시의원으로 당선됐다. 2006년 당시 과천시의원 7명 가운데 5명은 한나라당, 1명은 진보신당, 나머지 한 명이 그였다. 과천시장 또한 한나라당 소속으로, 절대적인 소수였다. 그러나 서 당선자는 지난 4년 동안 과천시의회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그는 2006년부터 과천시가 넘긴 예산을 ‘주민참여 예산 워크숍’에서 공개하는 등 주민과 함께하는 예산심의를 통해 시청의 예산 낭비를 집중적으로 감시했다. 그의 노력으로 과천시는 지난해부터 심의 전 예산안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한편 2008년에는 ‘친환경 상품 구매 촉진 조례’를 만들어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있는 과천시 초등학교에 친환경 농산물이 공급되도록 했다.


지난 지방선거 선거운동 기간에 경기 과천시 시민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서형원 후보의 유세를 지켜보고 있다. 풀뿌리 후보들의 무기는 유권자들의 눈높이에서 다가간다는 점이다. |서형원 제공


이들 세 당선자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풀뿌리 후보들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반은 오랜 기간의 지역운동 경험이다. 풀뿌리 후보들은 정당 공천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는 조직력과 자금력 문제도 지역운동을 하면서 닦아 놓은 주민네트워크를 활용해 해결했다. 정정섭 당선자에게는 구례농민회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지역농민 네트워크가 큰 힘이 됐다. 유병철 당선자에게는 각종 주민봉사 활동 과정에서 형성된 지역주민 네트워크와 자원봉사 학교 출신들이 도움이 됐다. 서형원 후보의 경우에는 생협, 공부방, 지역신문 등 형태로 다른 지역보다 잘 발달돼 있는 과천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탄탄한 기반이 됐다.


풀뿌리 후보들의 공통점은 정당 공천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정정섭 당선자는 “처음부터 정당 공천은 생각하지 않았다. 호남을 지배하고 있는 민주당은 너무나 나태하다. 주민들에게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유병철 당선자도 마찬가지다. 정당 공천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참여연대나 경실련처럼 수도권에 기반을 둔 시민단체에도 활동한 적이 없다. 그는 “기초의원이라는 자리를 정치 입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해 온 지역활동의 연장선일 뿐이다. 지역의 주인공은 주민이고 나는 조연일 뿐”이라고 말했다. 서형원 당선자는 “정당 공천 후보인 경우 권력을 잡으면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풀뿌리 후보들은 주민들에게 권력을 되돌려주고 주민들이 그 주체가 되도록 연결하는 역할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낙선한 이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서울 도봉구 기초의원으로 출마한 이창림 후보는 “동네정치에는 정당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을 정점으로 각 지역 지구당으로 내려오는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를 하고 있는 기존 정당은 주민들의 정치 참여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본다. 이 후보는 “정당 소속인 경우 정당공천을 받는 게 핵심적인 관심사가 된다. 우리 동네, 우리 지역의 문제를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는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충복 옥천에서 출마한 오한흥 후보는 “기존 정당은 지역 정치를 악용해 중앙정치의 용병으로 쓰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시·군·구에서 정당 소속으로 나오는 후보들의 자질은 비참할 정도”라고 비판했다.


현행 지방선거 제도는 풀뿌리 후보에게는 크게 불리하다. 현행 지방선거 제도에서 후보자들은 정당별로 기호를 받는다. 중선구제를 도입하고 있는 기초지방의원 선거의 경우 한 선거구에서 한 정당의 후보자가 복수로 나올 경우 ‘1-가’ ‘1-나’ ‘1-다’ 형태로 기호를 붙인다. 반면에 정당 소속이 아닌 풀뿌리 후보들은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번호를 배정받는다.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기호를 통해 정당을 구분하는 데 익숙한 유권자들에게 풀뿌리 후보들이 인지도를 높이는 데 불리하게 작용한다.


지방정치의 중앙정치 종속성이 유달리 큰 한국 정치문화도 풀뿌리 후보에게는 큰 걸림돌이다. 6·2 지방선거만 보더라도 북풍과 노풍, 안보 유지와 정권 심판 등 대형 의제들이 선거판을 잠식하면서 어떤 인물이냐보다는 어느 정당 소속이냐가 승부를 갈랐다. 정당 프리미엄 없이 작은도서관 설치,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 아동·청소년 인권 및 참여 조례 등 생활밀착형 공약을 들고 나온 풀뿌리 후보가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


중앙정치 종속성도 큰 걸림돌

풀뿌리 후보들이 기초의원 정당공천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선거에서의 당락이라는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다. 지난 6월 3일 경실련 강당에서는 경실련 2010지방선거유권자운동본부 주최로 ‘6·2 지방선거 평가와 선거제도 개선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토론자로 나온 김인식 경기대 행정대학원장은 “중앙정당이 중앙정부를 중간평가하는 대리전 선거로 몰아가기 때문에 지방선거는 실종 내지 왜곡되고 있다”면서 “지방선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올바르고 유능한 지역 지도자 선출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방의회가 특정 정당에 의해 과대 대표될 경우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할 수 없다는 우려다. 김 교수는 “정당 공천을 받고자 기초의원까지도 중앙정당을 향해 길게 줄을 서 있다. 이렇게 지방선거가 중앙정치에 예속될수록 주민들의 실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지방자치의 원리는 작동하기 어렵다”면서 “적어도 기초자치단체 수준에서만이라도 당분간 정당 공천을 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반면에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중앙정치에 의한 지방정치 종속, 주민자치 실현 방해, 풀뿌리 자치운동의 억압 등의 폐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공천제 폐지는 대의민주주의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봤다. “공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정당 공천제를 없애자는 것은 정당 정치의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정당을 폐지하자는 논리와 같다. 지방자치 실현이 안 되는 것은 정당 문제 이외에 다양한 이유가 있다. 정당 공천만 폐지하면 지방정치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환원주의적 사고다. 정당 개입을 배제할 경우 풀뿌리 후보보다 지역 패권을 장악한 토호 세력이 지배할 가능성도 있다. 공천제도 개선과 정치 발전을 통해 지방자치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결국 핵심은 지방정치에서 주민자치 원리를 어떻게 잘 구현해 내느냐다. 풀뿌리 후보들이 기존의 정당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들의 지방의회 입성은 지방정치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수 있다. 풀뿌리 자치 연구소 ‘이음’의 김현 연구원은 “풀뿌리 후보들은 동네에서 활동하면서 쌓은 현장감이 있기 때문에 정당 소속 후보보다 실제 의정 활동에서 더욱 생생한 주민의 목소리를 반영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풀뿌리 후보들의 노력이 생활 속 시민들의 고민과 소망을 정치로 투사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의미있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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